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혼잣말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삶을 풍요롭게 하죠. 저는 말 없는 세상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생각해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언어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는 건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늘 제 직업이 고맙습니다. 모든 말은 제 관심사입니다. 이야기는 물론이고, 혼잣말도 관심사입니다. 말은 물론이고, 글도 관심사입니다. 좋은 말뿐 아니라 욕도 관심사입니다. 이야기는 중요하고 좋은 것인데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종교, 정치, 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칫하면 분위기를 얼어붙게 하고, 싸움을 일으킵니다. 서로 기분이 좋지 않게 된다면 그런 주제는 피해야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종교나 정치나 성은 모두가 중요한 주제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피하면 안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겁니다. 교육도 부족하고요. 종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가장 높은 가르침이 종교(宗敎)입니다. 대화를 피할 것이 아니라 더 나누어야 할 이야기죠. 그런데 종교 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고집과 집착입니다. 그리고 가장 피해야 할 분노입니다. 종교의 목표는 평화인데, 종교가 싸움의 원인이 됩니다.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잘못 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깊어집니다. 그런 종교 이야기를 나누기 바랍니다. 저는 가까운 사람과 종교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 기쁘고, 아름다운 시간이 없습니다. 종교 이야기는 더 좋은 가르침을 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마음을 열고 배우기 바랍니다. 저 역시 남은 시간 제일 많이 공부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종교입니다. 배울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종교만 공부하면 종교 공부가 아닙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겁니다. 서양의 정치와 동양의 정치에 대한 관념이 조금씩 다릅니다. 일단 어원 자체가 다릅니다. 서양의 정치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데, 동양의 정치는 힘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정치(政治)의 한자를 가만히 보면 ‘올바름[正]’이 중심에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정치 이야기는 말로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머리를 맞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는 어렵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기준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가 망가지는 것은 말을 함부로 하고, 자신만이 올바르다고 우길 때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정치적’이라고 비꼽니다. 저 사람은 정치적이라는 말만큼 기분 나쁜 표현이 없는 겁니다. 진짜 정치 이야기를 합시다. 듣는 귀와 내 마음을 전하는 말을 공부합시다. 성(性)에 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일 겁니다. 한자 그대로 마음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잘못 이야기를 꺼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성이 유머가 되고 해학이 되지만, 짓궂음이 되고 망신살도 됩니다. 따라서 성은 시간과 장소, 수위의 조절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청자가 듣기 싫어하면 무조건 하면 안 됩니다. 듣는 이가 좋아한다면 문제가 될 게 없겠지요.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못하면 인생이 어그러집니다. 저는 좋은 사람끼리 솔직하고 따뜻한 성 이야기는 환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이야기라면 더 좋을 겁니다. 얼어붙은 화제를 즐겁게 돌리는 이야기로 시간과 장소와 분위기만 맞는다면 피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우리 이제 종교와 정치와 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즐겁게 나눕시다. 고집과 집착과 분노와 모욕과 무시와 주책없음은 빼고 말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야기 종교 종교 이야기 정치 이야기 종교 정치
2025.10.19. 19:22
달을 보라고 하였더니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표현은 간단하지만 실생활에서는 간단하지 않은 순간이 많습니다. 실체를 보아야 하는데, 실체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그만 길을 잃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주로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기적에 빠져서 기적이 의미하는 바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저는 종교를 공부하면서 늘 기적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믿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기적이 종교에서 믿음의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은 기적을 강조합니다. 종종은 기적을 일으키는 종교인을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기적만 일으킬 수 있다면 유명하고, 능력이 있는 종교인이 되기는 쉬운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종교에서 기적은 조건이 아닙니다. 기적 때문에 길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전헌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종교를 향했습니다. 선생님이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셨고, 신학대학에서도 오래 강의를 하셨기에 종교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야기는 나누다 보면 모두 사는 문제이고, 가르침과 깨달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 이야기를 피하라고 하지만 종교가 싸움이 되지 않는다면 종교이야기만큼 즐거운 게 없습니다. 종교의 입문이기도 하면서 걸림돌이기도 한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저는 기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만났던 많은 종교인은 저의 믿음이 부족함을 지적하였습니다. 믿으면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여러 번 들었고, 그럴수록 의심은 커졌습니다. 저에게 믿음이 없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입니다. 저의 질문에 선생님은 뜻밖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그게 중요한가요?”라는 대답은 저를 잠시 멍하게 하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이유와 기적이 종교에서 중요한 이유를 묻는 저에게 선생님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답을 먼저 했던 겁니다. 실제로 종교에서는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을 경계합니다. 신통력을 발휘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지 결론은 아닌 겁니다. 그래서 기적이라는 말 대신 종교에서는 표적이나 표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 사건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후에 저는 손가락을 보지 않고, 달을 보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 기적을 일으켰을까? 그 기적을 통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를 살피면서 수많은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기적은 믿기가 쉬운 겁니다. 아무리 믿기 어려운 기적도 실제로는 표징이 됩니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가 믿기 어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달을 믿기 어려운 겁니다. 손가락이 기적 같은 일이라면 달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난신난해(難信難解)라고 표현했습니다. 믿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종교에서 중요한 제자들도 선생님의 그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내가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믿지 못합니다. 내가 부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어떤 기적을 믿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부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 밖의 믿음은 쉬워집니다. 그래서 믿으면 이해가 된다고 하였을 겁니다. 그게 중요한가요? 라는 대답이자 질문을 통해서 저는 종교가 더 좋아졌습니다. 종교를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사람을 공부하는 게 더 기쁨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사람을 바라보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물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든가, 부처라든가 하는 말은 여전히 의심상태입니다. 아무리 봐도 나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더 공부해야겠지요. 그게 중요한 것이니까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종교 이야기 기적도 실제 기적 때문
2024.05.05. 19:14